아나토베이스가 제작하는 모든 영상 카드에는 평균 30개에서 60개의 프레임이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 프레임 하나하나는, 예외 없이 사람의 손으로 직접 그려집니다. 빠르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처음부터 수작업을 선택했고, 지금까지 그 원칙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 글은 왜 우리가 그런 선택을 했는지, 한 장의 프레임이 완성되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 담긴 철학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왜 수작업인가
해부학 콘텐츠를 제작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3D 모델링입니다. 이미 만들어진 인체 모델에 텍스처를 입히고, 카메라 앵글을 조정하고, 렌더링 버튼을 누르면 됩니다. 실제로 시중의 대부분의 해부학 앱과 영상이 이 방식으로 제작됩니다. 빠르고, 일관되며, 대량 생산에 유리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3D 렌더링으로 만든 해부학 이미지는 어딘가 차갑고, 균일하며,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실제 인체는 완벽한 대칭이 아닙니다. 근육의 결은 사람마다 미세하게 다르고, 피부 아래 조직의 두께도 부위마다 달라집니다. 이런 유기적인 특성을 3D 모델이 완벽하게 재현하기는 어렵습니다.
의학 일러스트레이션의 역사를 돌아보면, 위대한 해부학 도해는 언제나 사람의 손에서 탄생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해부학 스케치부터, 프랭크 네터의 의학 일러스트레이션, 그리고 현대 해부학 아틀라스에 이르기까지, 수작업 드로잉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인체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방식 그 자체였습니다. 우리는 그 전통을 디지털 시대에 맞게 계승하고자 합니다.
3D 렌더링과 수작업 드로잉의 차이
3D 렌더링
- 균일한 텍스처로 생동감이 부족
- 모든 구조가 동일한 질감으로 표현
- 기계적 정밀함은 있지만 유기적 느낌 부재
- 대량 생산에 유리하나 개별 품질 한계
수작업 드로잉
- 근육 결의 미세한 차이를 자연스럽게 표현
- 부위별 특성에 맞는 개별적 묘사 가능
- 인체의 유기적인 형태와 질감을 충실히 재현
-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학습 효과가 높음
수작업에는 분명한 대가가 따릅니다. 하나의 프레임을 그리는 데 평균 4시간 이상이 걸리고, 하나의 영상 카드를 완성하려면 수십 장의 프레임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시간이 결코 낭비가 아니라고 믿습니다. 학습자가 영상을 보는 순간, 손으로 그린 프레임이 전달하는 깊이와 질감의 차이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한 장의 프레임이 완성되기까지
한 장의 프레임이 화면에 나타나기까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수많은 단계를 거칩니다. 그 과정은 참고 자료를 수집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해부학적 연구, 스케치, 디지털 페인팅, 레이어 분리, 색보정으로 이어집니다. 각 단계는 이전 단계의 결과물 위에 쌓이며, 어느 하나도 건너뛸 수 없습니다.
1단계: 참고 자료 수집
실제 인체를 직접 촬영한 사진, 해부학 아틀라스, 의학 교재를 교차 참고합니다. 하나의 구조를 그리기 위해 최소 3개 이상의 출처를 확인하며, 각도와 조명에 따른 형태 변화를 꼼꼼히 기록합니다.
2단계: 해부학적 연구
그릴 구조의 기시(Origin), 정지(Insertion), 작용(Action)을 정확히 파악합니다. 근육이 어디서 시작해서 어디에 붙는지, 수축했을 때 어떤 움직임을 만드는지를 이해해야 정확한 형태를 그릴 수 있습니다.
3단계: 연필 스케치
디지털 캔버스 위에 러프 스케치를 그립니다. 전체적인 비례와 위치를 잡고, 근육의 방향과 볼륨감을 대략적으로 설정합니다. 이 단계에서 해부학적 오류를 먼저 잡아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4단계: 디지털 페인팅
스케치를 바탕으로 정밀한 디지털 페인팅 작업에 들어갑니다. 근육의 결, 건(tendon)의 질감, 뼈의 표면 느낌을 하나하나 묘사합니다. 이 과정이 전체 작업 시간의 절반 이상을 차지합니다.
5단계: 레이어 분리
완성된 프레임을 피부, 근육, 뼈 레이어로 분리합니다. 인터랙티브 기능을 위해 각 레이어가 독립적으로 표시되어야 하므로, 경계면을 정밀하게 마스킹하고 각 요소를 개별 파일로 추출합니다.
6단계: 색보정 및 최종 검수
모든 프레임의 색상 톤, 명도, 채도를 통일합니다. 영상으로 연결했을 때 자연스러운 흐름이 되도록 프레임 간 색감 차이를 미세 조정하고, 해부학적 정확성을 최종 확인합니다.
숫자로 보는 제작 규모
이 모든 과정을 거쳐 완성된 결과물의 규모를 숫자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하나의 숫자 뒤에는 수많은 시간의 집중과 반복이 담겨 있습니다.
260+
제작된 영상 카드
15,000+
수작업 프레임
~45
영상당 평균 프레임 수
4h+
프레임당 평균 작업 시간
도구와 기법
아나토베이스의 아티스트들이 사용하는 주요 도구는 Adobe Photoshop과 Clip Studio Paint입니다. 두 소프트웨어 모두 레이어 기반 작업에 최적화되어 있으며, 해부학 일러스트레이션에 필요한 정밀한 브러시 컨트롤을 제공합니다. 하드웨어로는 Wacom Cintiq 시리즈 태블릿을 사용하여, 종이 위에 그리는 것과 유사한 필압 감도와 정밀도를 확보합니다.
레이어 기반 디지털 페인팅
우리의 핵심 기법은 레이어 기반 디지털 페인팅입니다. 하나의 프레임 안에서 피부, 지방 조직, 근막, 근육, 건, 인대, 뼈를 각각 별도의 레이어에 그립니다. 이렇게 하면 나중에 인터랙티브 기능을 구현할 때 각 구조를 독립적으로 표시하거나 숨길 수 있습니다.
브러시 설정도 구조별로 다릅니다. 근육을 그릴 때는 섬유 방향을 따라 결이 드러나는 브러시를 사용하고, 뼈를 그릴 때는 단단하고 매끈한 질감을 표현하는 브러시를 사용합니다. 건이나 인대처럼 광택이 있는 조직에는 별도의 하이라이트 브러시를 적용합니다. 이런 세밀한 구분이 최종 결과물의 사실감을 높여줍니다.
"근육 하나를 그리는 데 몇 시간이 걸릴 때가 있습니다. 기시부에서 정지부까지 섬유의 방향을 따라가다 보면, 그리는 사람도 그 구조를 완전히 이해하게 됩니다. 손으로 직접 그리는 행위 자체가 해부학 공부이기도 합니다."
— 아나토베이스 수석 아티스트하나의 영상이 완성되기까지
개별 프레임의 완성은 전체 과정의 일부에 불과합니다. 하나의 영상 카드가 최종 제품으로 탄생하기까지는 훨씬 더 긴 여정이 필요합니다. 그 여정은 기획 단계에서 시작됩니다. 어떤 부위를, 어떤 각도에서, 어떤 순서로 보여줄 것인지를 결정하는 일입니다.
기획이 확정되면 콘셉트 스케치 작업에 들어갑니다. 영상의 첫 프레임과 마지막 프레임을 먼저 그려 전체적인 흐름을 설계합니다. 피부 위에서 시작해 근육을 드러내고, 다시 뼈까지 보여주는 순서가 자연스러운지, 학습자 입장에서 직관적으로 이해되는 흐름인지를 반복적으로 검토합니다.
콘셉트가 확정되면 본격적인 프레임 제작에 들어갑니다. 30~60장의 프레임을 하나하나 그리는 이 과정이 전체 제작 기간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아티스트는 이전 프레임과의 연속성을 유지하면서도 각 프레임에서 새롭게 드러나는 구조를 정확하게 묘사해야 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그림 실력을 넘어, 해부학적 지식과 애니메이션 감각을 동시에 요구하는 작업입니다.
프레임이 모두 완성되면 시퀀싱 작업을 합니다. 프레임을 순서대로 배열하고, 각 프레임 사이의 전환이 부드러운지 확인합니다. 필요한 경우 중간 프레임을 추가하거나 타이밍을 조정합니다. 이 단계에서 영상의 템포와 리듬이 결정됩니다.
마지막으로 해부학 전문가의 검수를 거칩니다. 근육의 명칭, 위치, 형태가 의학적으로 정확한지 하나하나 확인하고, 수정이 필요한 부분은 아티스트에게 피드백이 전달됩니다. 때로는 하나의 근육 형태를 수정하기 위해 여러 장의 프레임을 다시 그려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과정을 모두 통과해야 비로소 하나의 영상 카드가 완성됩니다.
장인 정신
왜 이렇게까지 하는가, 라는 질문을 자주 받습니다. 더 빠르고 저렴한 방법이 있는데 왜 굳이 프레임 하나하나를 손으로 그리느냐는 것입니다. 대답은 간단합니다. 학습자에게 가장 좋은 결과물을 만들고 싶기 때문입니다.
해부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단순히 구조의 이름을 외우는 것이 아닙니다. 근육이 어떤 형태이고, 어떤 방향으로 뻗어 있으며, 주변 구조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입체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런 깊이 있는 이해를 돕기 위해서는, 콘텐츠 자체가 그만큼의 깊이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손으로 그린 프레임에는 아티스트의 해부학적 이해가 그대로 녹아 있습니다. 근육의 결을 따라 붓질의 방향이 정해지고, 조직의 두께에 따라 명암의 농도가 달라집니다. 이런 미세한 표현들이 모여 학습자가 화면을 통해 인체의 구조를 '느낄' 수 있게 만듭니다. 이것은 3D 렌더링으로는 도달하기 어려운 영역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단순한 효율의 문제가 아니라, 교육에 대한 태도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배우는 사람이 최선의 자료로 공부할 수 있도록, 만드는 사람이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이 아나토베이스가 지키고자 하는 장인 정신입니다.
팀의 약속
아나토베이스 아티스트 팀은 하나의 원칙을 공유합니다. "빠르게 만드는 것보다, 제대로 만드는 것이 먼저다." 15,000장이 넘는 프레임 하나하나에 그 약속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그린 모든 선에는 학습자를 향한 책임감이 깃들어 있으며, 그 책임감이야말로 아나토베이스 콘텐츠의 진짜 경쟁력입니다.